간호학 알쓸신잡

세계 간호 역사③ - 중세 후기 간호

집사냥 2023. 5. 22. 12:15

민족이동과 이민족의 침입 등으로 혼란했던 전기와는 달리 11세기 이후 유럽 사회는 매우 안정되었다. 특히 이슬람 문명에 대해 그들은 십자군 운동을 일으켜 내부의 힘을 밖으로 표출하고자 하였다.

1. 십자군 운동과 이슬람 의학의 전래

십자군 운동은 기독교인들이 11세기 말부터 약 200년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위해 일으킨 군사 운동이었다. 십자군 운동은 군사적인 면에서 실패했으나 학문, 특히 의학에 있어서는 큰 유익이 되었는데, 유럽인에게 그들보다 앞선 이슬람의 학문과 의학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그리고 갈렌의 저서들도 십자군 운동을 통해서 유럽에 전달되었다.

2. 기사단과 간호

1) 성요한 기사간호단

이 구호소는 성지로 순례하는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에게 간호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1차 십자군 원정 후 기사들의 보호 아래 들어갔고 원래 목적에 순례객에 대한 군사적 보호와 성지의 방어라는 목적을 추가하였다. 이 기사단은 구호소 자매단(The Hospitaller Sisters)을 통해 여성을 위한 성메리 막달레나 구호소도 같이 운영하였다.

2) 튜튼 기사간호단

야전 구호소를 지키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아크레에 세운 독일인 중심의 기사단이다. 그러나 13세기 초 성지를 완전히 잃은 후에는 순례자와 병자 보호보다는 군사적 기능에 집중하였다.

3) 성라자로 기사간호단

성라자로 기사간호단은 12세기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세운 나환자 병원에서 유래하였다. 이 단체는 처음부터 구호에 전적인 노력을 하여 성요한 기사간호단이 방문객을 구호한데 비해 구성원들은 스스로 나환자들이었다.

3. 중세 대학과 살레르노

12세기경 도시의 발달과 함께 주요 도시에는 기존의 성당학교에서 발전한 대학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법학은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 신학은 파리 대학, 의학은 이탈리아의 살레르노(Salerno) 대학이 유명하였다. 살레르노 대학은 10세기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에 세워진 의학 학교였으며 베네딕트 수도원에 의해 운영되었다. 살레르노 대학에서는 여성도 학생이나 교수가 될 수 있었다. 12~3세기에 작자 미상의 '살레르노 요양법'이라는 시가 유행했으며, 이 시는 살레르노 대학의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는데 시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만일 의사들이 고치지 못하면 다음의 세 가지를 의사로 삼으라. 즐거운 마음과 휴식 그리고 적당한 음식이다."

4. 길드와 간호

중세 도시는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길드라는 조직들이 있었다. 길드는 구성원들의 공통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조직이었으나 구성원들을 서로 돕는 역할도 감당하였다. 한 구성원이 죽으면 동료들은 그 유가족을 돌보았고 자녀 교육을 책임졌다.

5. 탁발승단과 간호

13세기경에 생겨난 탁발승단은 수도원에 머무르지 않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탁발(걸식) 하는 수도회이다. 가장 대표적인 탁발승단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이다.

1) 프란체스코 수도회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설립한 성 프란체스코는 가난과 청빈의 삶을 중요하게 여겼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은 성 프란체스코가 정한 계율에 따라 탁발 수도를 수행하였다. 가난한 자를 돕고 설교로 민중을 교화하였으며, 특히 이들은 나병 환자를 보살피는데 헌신하였다. 성 프란체스코는 그의 여자제 성 클라라를 통해ㅐ 여성 수도회를 조직하고 '빈곤한 클라라단'으로 불렀다.

2) 도미니크 수도회

도미니크 수도회는 성 도미니크가 조직하였다. 이들은 청빈한 삶을 규정하였으나 프란체스코 수도회만큼 청빈의 덕을 강조하진 않았는데, 도미니크 수도회의 주된 기능은 민중들을 이단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다니면서 설교하는 것이었다.

6. 흑사병과 간호

14세기 중엽 유럽 사회는 흑사병이라는 대재앙을 경험하였다. 고열과 구토를 동반하며 피부가 검게 변하여 흑사병(Black Death)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1347년 유럽에 도착한 이 병으로 약 4년 만에 유럽 인구의 1/3이 죽는 결과를 초래했다. 11세기 이후 꾸준히 증가해 온 인구를 유럽 사회는 부양할 수 없었고, 사람들은 만성 영양실조와 생존의 한계선상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엄청난 인명 손실을 가져온 것이다. 이러한 재앙에 직면한 유럽인들은 전반적인 공항에 빠졌다. 한 도시에 흑사병이 도착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도시를 버렸고 가족이라도 병자를 돌보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흑사병을 신의 벌이라고 믿었으며 회개하거나 채찍질 고행을 통해 하느님의 심판을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것은 당시 유럽의 의학지식이 이슬람 의학에 비해 얼마나 뒤떨어져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체계적으로 환자를 격리시키고 오염물을 제거하는 대책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